[보도자료][조선일보 최보식이 만난사람] 이재호 이사장 기사 (조선일보_2018.12.31)

박주****
2020-02-14
조회수 2688


[조선일보 최보식이 만난사람] 이재호 이사장 기사
초등학교 못 나온 '주얼리업계 황금손'의 기부철학… 이재호 월곡주얼리산업진흥재단 이사장(리골드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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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20181231



지난 2018년 12월 31일 조선일보 최보식 선임기자가 만난 사람이라는 컬럼에 월곡주얼리산업진흥재단 이재호 이사장이 소개되었습니다.

"남에게 도움을 안주고는 나도 돈을 벌지 못한다, 잘 사는 것은 남을 돕는 경쟁이다"라는 이재호 이사장의 가치관을 인터뷰한 내용인데 지난 해 7월에 출판된 "필연적 부자"라는 책을 읽고, 최보식 선임기자가 인터뷰한 내용을 내 보낸 것입니다.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한 주얼리업계의 황금손, 이재호 월곡주얼리산업진흥재단 이사장, 리골드 회장의 인터뷰 내용 한 번 보시죠.



이재호(76) 리골드 회장을 만난 것은 '필연적 부자'라는 그의 자서전을 읽고 난 뒤였다.

'모든 사람이 돈 벌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지만 정작 당신에게 돈을 주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는 게 현실이다. 이 세상에는 당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자신들에게 써주기를 바라는 사람들만 있을 뿐이다. 어떻게 하면 돈을 벌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은 아예 잊고, 당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값지게 활용될 수 있을까를 생각하라. 타인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면 게임은 끝난 것이다. 그들이 당신을 활용하는 시간이 차츰 많아지면 부(富)도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이재호 회장은“젊은이들 꿈이 없는 건 편하게 살고 돈 잘 버는 것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밑바닥에서 출발해 국내 시장 매출 1위의 금목걸이 기업 '리골드'를 키워낸 인물이다. 사재(私財) 200억원으로 연구장학재단을 설립했고, 몇 달 전에는 서울시립대에 장학금 10억원도 기부했다. 필자를 만났을 때 그는 "제가 아주 무식한 사람입니다. 월사금 낼 형편이 못 돼 초등학교도 일곱 달 다닌 게 고작입니다"로 시작했다.

"심한 장애를 앓았던 부친이 일찍 세상을 뜨고 모친은 날품팔이로 살림을 꾸려갔지요. 우리 4형제는 그날그날 굶지만 않아도 감지덕지했어요. 17세 때부터 울산에서 백화점 점원으로 일했지요. 그러던 중 '먹고살려면 기술이 있어야겠다'는 생각에 시계방을 찾아갔습니다. 기술 배우는 대가로 매달 쌀·콩·고추·마늘 등을 주인에게 바쳤습니다. 인턴사원이 기본 급여를 받는 요즘과는 전혀 딴 세상이지요. 밤에는 의자를 치우고는 바닥에서 잠을 잤습니다."

그 뒤 경북 영천을 거쳐 부산에서 금방을 겸한 시계 수리점을 열었다. 1979년 2차 오일쇼크로 경기 침체에 빠졌을 때 서민들은 현금 마련을 위해 금반지·금목걸이·금팔찌 등을 내다 팔았다. 그는 이를 사들여 녹여서 골드 바를 만들었고 부동산에도 투자했다.

"그때까지 남들처럼 일요일에 쉬거나 놀러 간 적이 없었지요. '하루라도 일을 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강박에 빠져 심신은 피폐해졌습니다. 38세가 되던 어느 날 재산을 정리해보니 '이제는 그만 벌어도 남은 인생을 충분히 살겠다'는 걸 확인했습니다. 금방을 처분하고는 1년만 쉬어보자고 마음먹었습니다. 정말 지긋지긋하게 일했으니까요."

당초 정해놓은 날부터 그는 쉬었다. 아침에 눈 뜨면 '이제는 출근 안 해도 된다'라며 다시 누우니 너무 행복했다. 하지만 한 달쯤 지나니 갈 데가 없었다고 한다.

―나 같으면 번 돈으로 그동안 못 해본 것을 즐겼을 텐데요.

"쉬겠다는 생각을 했지 쉬면서 돈을 쓴다는 생각은 없었어요. 돈 쓰는 것도 평소 해본 사람이 하지 안 해본 사람은 그런 생각조차 못 합니다. 일을 안 하고 날마다 시간을 때우는 방법이란 게 산에 올라가 그냥 미친 사람처럼 뛰어다니는 것뿐이었습니다. 석 달쯤 지나니 일하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습니다."


                                       

공장에서 일할 때의 모습

 

―정 그러면 일을 다시 시작하면 되지 무슨 고민을 합니까?

"그런 마음이 들 때마다 '나 자신과 쉬겠다는 약속을 했으니 지켜야 한다'고 다짐했습니다. 못 지킬 약속은 아예 안 하지, 한번 약속했으면 저는 여태껏 안 지킨 적 없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산사에서 열린 법회(法會)를 구경했습니다."

당시 이런 설법을 들었다고 한다. '극락과 지옥의 환경은 다를 바 없었는데 극락 사람들은 얼굴이 윤기가 나고 복스럽고 지옥 사람들은 피죽 한 그릇 못 먹은 것처럼 피골이 상접하더라. 극락이나 지옥이나 똑같이 팔 길이보다 훨씬 긴 밥숟가락을 하나씩 주는데 왜 그러느냐. 극락 사람들은 그 긴 숟가락을 가지고 서로 떠먹여 주다 보니 제때에 밥을 먹어 윤기가 날 수밖에 없고 반면 지옥에 있는 사람들은 그 숟가락으로 자기 입에만 퍼넣으려고 하니 흘리고 버려서 결국 쫄쫄 굶더라….'

이 우화 같은 얘기에 "남에게 활용될 때 내 가치가 있구나. 남에게 도움 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고 남을 도와야 그 대가로 얻는구나"라며 그는 깊이 감동했다.

―그전에는 남에게 베풀 줄 모르고 각박했습니까?

"범죄를 짓거나 경우에 어긋나는 짓은 안 했지만, '남을 위해 살면 손해 보는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절에서 설법을 듣고는 '이게 진리야. 남에게 도움을 안 주고는 나도 돈을 벌 수 없다. 잘 사는 것은 결국 남을 돕는 경쟁'이라고 깨달았지요."

딱 1년을 쉰 뒤 그는 금목걸이 제조공장을 해야겠다고 작정했다.

"그때만 해도 금목걸이 제조 과정은 전혀 모르고 소매만 했지요. 당시 금목걸이는 표면이 거칠고 광택이 투명하지 못했어요. '내 손으로 금목걸이를 선진국 수준으로 끌어올리면 이재호 인생은 값진 것이 된다, 세상에서 가장 예쁜 목걸이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만 가득 찼습니다."

그는 서울 방배동에 있는 금목걸이를 만드는 가내 공장을 수소문해 찾아갔다. 기술을 배우러 왔다는 말에 문전 박대당했지만 그는 고집스럽게 사흘간 찾아갔다. 공장 사장에게 '금목걸이 재료를 내가 대고 만든 제품도 다 팔아주겠다. 이익은 전부 당신이 갖고 나는 만드는 과정만 보겠다. 절대로 당신이 손해 보는 일은 없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해서 그 공장에서 여섯 달 합숙하며 기술을 익혔다. 막상 부산에 내려와 기계를 돌려보니 제품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일본에 가서 정식으로 기술을 배워와야겠다고 마음먹었지요. 학원에서 일본어를 서너 달 배웠습니다. 일어 선생님이 내 사정을 듣더니 '그러면 일본이 아니라 이탈리아를 가야 한다'고 했어요. 이탈리아가 어디 붙어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지도책을 사서 찾아봤어요. 그리고 일본 귀금속 카탈로그에 나온 이탈리아 제조업체 주소에 편지를 썼지요. 번역소에 찾아가 편지를 영역(英譯)했고요. 그 시절 해외에 나가려면 그쪽 회사의 초청장이 필요했어요. 석 달이 지나도 답장이 없어 한 번 더 편지를 썼습니다."

반년 만에 초청장이 왔다. 하지만 초청장에 꼭 들어가 있어야 할 이탈리아 주재 한국대사관의 직인이 없었다. 다시 편지를 썼고 3개월 뒤 대사관 직인이 찍힌 초청장이 왔다. 그는 지인의 소개를 받아 코트라(KOTRA)를 찾아가 이탈리아에서 도와줄 가이드를 부탁했다. 평생 처음 해외여행이고 영어 한마디도 못하고 동행하는 사람도 없었다. 부산 김해공항에서 김포공항으로 가서 일본 도쿄, 태국 방콕, 사우디아라비아 제다, 스위스 취리히를 거쳐 비행기를 다섯 번 갈아타는 여정이었다. 

"전날 밤 두려워서 잠이 안 왔어요. 비행기도 안 타봤는데 갈 수는 있으려나 가서 돌아올 수 있으려나. 집사람에게 '만약 못 돌아오면 내 재산이 어디에 있으니 그중 3억원은 가족이 쓰고 나머지는 공장에 다 투자해 좋은 목걸이를 만들어라'고 유언했어요. 집사람은 '가지 말라'며 펑펑 울고, 나는 '세상에서 최고 목걸이를 선물하겠다고 약속했다. 고객의 만족과 행복을 위해 전사(戰死)하겠다'고 말했어요. 그 광경을 떠올리면 기가 막혀요."


 

―무슨 전쟁터에 나가는 것 같습니다.

"그때는 꼭 그런 심정이었어요. 지금 생각해봐도 포기하지 않고 도전한 게 가상하죠."

그는 이탈리아에서 두 달간 기술을 배운 뒤 기계 설비를 들여올 수 있었다. 그 뒤로 그의 금목걸이는 월등한 품질로 타사 제품을 압도했다. 어느 날 그는 경쟁사 사장 30여명을 초청해 자신의 공장 설비를 견학시켰다.

"제가 만든 아름다운 금목걸이를 더 많은 사람이 갖게 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혼자 만들어서 전국 방방곡곡 팔기에는 영업망도 안 되고 시간이 너무 걸리지 않습니까. 견학한 뒤로 이분들도 이탈리아에서 기계를 수입해와 똑같이 만들었어요. 수입 기계가 잘 안 돌아가면 우리 공장에 와서 배웠어요."

 ―이상한 논리인데, 차별적 품질로 경쟁에 이겨 많이 파는 게 기업의 목표 아닌가요?

처음에는 직원들도 '비법을 다 가르쳐주면 우리 회사 문을 닫아야 한다'며 말렸어요. 나는 '걱정하지 마라. 그 사람들이 돈만 벌려고 하면 우리 경쟁자가 못 된다, 고객에게 도움이 되겠다는 연구 능력에서 우리를 못 따라온다'고 말했어요. 세월이 흐르자 예상대로 그 분들의 공장은 거의 다 문을 닫았어요."

―같은 기계와 기술인데 왜 그런가요?

"똑같은 기계라도 정성에 따라 달라집니다. 가령 목걸이 제조에 열두 공정을 거쳐야 하면 이들은 아홉 공정만 합니다. 생산단가를 낮추는 게 우선이니까. 하지만 저는 세상에서 가장 예쁜 제품을 고객에게 선물하는 게 목표인데 그렇게 할 수 없지요."

―고객에게 돈을 받고 파는데 무슨 '선물'입니까?

"일할 때의 마음 자세를 말합니다. 우리 공장의 모토가 '가장 아름다운 제품을 만들어서 네 애인에게 선물을 한다는 생각으로'입니다. 선물을 받는 애인의 입장에서 만들라는 겁니다. 고객이 제가 만든 예쁜 목걸이를 보고 미소 짓는 것을 상상하면 너무 행복합니다. 고객을 미소 짓게 하면 돈은 따라오는 부산물입니다."

―맨손으로 이뤄낸 회장님의 성공은 부러워할지 모르나, 회장님처럼 뼈 빠지게 일하며 살고 싶어 하는 젊은이들은 없을 겁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꿈이 없다고 하는데, 그건 편하게 살고 돈벌이를 잘할 수 있는 것만 생각하니까요. 경쟁에서 남보다 앞서고 이기기 위한 것만 생각합니다. 어떻게 하면 남을 잘 도울 수 있을까, 그렇게 돕는 능력을 향상하면 인생이 달라집니다. 남에게 쓰인 만큼 얻어지는 겁니다. 제가 앞으로 몇 년 더 살지 모르나 남은 개인 재산을 이런 교육에 써보고 싶습니다. 말도 안 되는 꿈을 저 혼자 꾸고 있는 거죠."

2018년 마지막 날이 됐다. 내일은 내일의 해가 떠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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